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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빙트리'책방지기로 시작하다

by 노을이내리는나루 2025. 4. 2.

오래된 통닭집에서 피어난 책방

1. 2023년 5월

낙동강을 품고 있는 물금, 높은 산이 감싸 안은 이곳은 물과 볕이 풍부한 동네다.

서리단길이라 불리는 작은 골목에는 다닥다닥 붙은 오래된 구옥들이 정겹게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낡고 초라했던 한 곳이, 지금 나의 책방이 되었다.

한때 이곳은 오래된 물금 통닭집이었다. 빛바랜 석면 지붕 아래,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초라했던 가게.

하지만 30여 년의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고민하던 나에게, 이 낡은 공간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사실 그 시절, 나는 막연히 떠나고 싶었다.

낯선 도시의 시골장터를 배회하고 싶었고, 바닷가에 앉아 파도의 일렁임을 바라보며 머리를 비우고 싶었다.

사람들의 소음 속에서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나를 내려놓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과 함께 산책을 하다가 이곳에 발길을 멈추었다.

불이 켜진 책방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들어가면서, 마음 한구석에서 잊고 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에겐 잘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젊을 때는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옳고, 나이를 먹으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맞다.”

그 말이 내 마음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렇게 나는 ‘‘흰머리의 책방지기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과의 만남이 적은 공간을 원했지만, 정작 책방을 운영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동네 상인들의 따뜻한 인사와 소소한 대화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점점 홀로 있는 시간을 선택하게 되었다.

독서, 뜨개질, 홈 스타일링 등 오롯이 나를 위한 취미들이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그렇게 번잡했던 마음이 정돈되고, 내 안의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2. 2023년 11월

책방 뒤편에는 쥐가 들끓고 먼지가 쌓여 있던 허름한 창고가 있었다. 하지만 그곳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손을 보태면서 지금은 따뜻한 코타츠방과 감성적인 모임 공간이 되었다.

중정에는 계절마다 야외 모임이 열리고, 손님들은 이곳에서 추억을 쌓아간다.

낡은 것을 모두 없애기보다, 살릴 것은 살리고 버릴 것은 과감히 없앤 결과물이었다.

겨울이 오면서 중정에는 캠핑난로와 의자를 두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 따뜻한 차가 부글부글 끓고, 그 향이 은은하게 공간을 감싼다.

몸도 마음도 움츠러드는 계절이지만, 이 작은 공간이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책방을 시작한 후, 오랜만에 문학의 감성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예전엔 바쁜 일상에 치여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제는 문장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익숙한 인간관계와 모임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에서 충만함을 찾는다.

그렇게 나는 나와 잘 맞는 삶을 찾아가고 있다.

오래된 통닭집에서 피어난 작은 책방.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내 삶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