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삭 속았수다” : 아흔 살 순이 할머니가 들려주는 제주 인생기
낯선 제목, 따뜻한 이야기의 시작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삭 속았수다'. 제목부터 낯설고 묘하게 끌리는 이 드라마는, 제주 방언으로 ‘완전히 속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처음엔 그저 유쾌한 제목에 이끌려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지고,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드라마였다. 이건 단순한 회고담도, 시대극도 아니다. 아흔 살 순이 할머니가 자신의 일생을 담담하게 풀어내며, 한 여자의 굴곡진 인생사를 통해 제주라는 섬의 역사와 정서를 조용히 건네는 이야기다.
한 여자의 인생, 곧 제주의 역사
드라마는 순이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가난하고 힘겨운 시절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늘 반짝였다. 처음 마음을 준 소년, 거센 폭풍처럼 스쳐간 첫사랑, 그 뒤에 이어진 삶의 굴곡들. 순이의 삶은 잔잔하게 흐르지 않았다.
제주 4.3 사건이라는, 우리가 역사책에서나 보던 아픔이 그녀의 삶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특별한 이유는, 그 상처를 ‘비극’으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울음이 있어야 웃음도 있고, 떠남이 있어야 만남도 있다. 그 모든 것을 통과해 나이 아흔에 이른 순이의 삶에는, 슬픔과 기쁨이 겹겹이 쌓여 있다.
배우들의 연기, ‘진심’으로 다가오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은 ‘진심’이다. 제주 방언을 그대로 살려낸 대사, 다소 투박하지만 정겨운 말투, 그리고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 연기가 만들어내는 진정성은 매 회 시청자를 이야기 속으로 깊이 끌어들인다.
특히 순이 역을 맡은 배우 엄정화와 김윤석의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그들이 표현하는 감정은 과하지 않지만,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젊은 순이를 연기한 신예 배우들도 인상 깊었고, 그 덕분에 한 인물의 서사가 더욱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제주의 풍경, 또 하나의 주인공
또 하나 인상 깊은 점은 ‘섬’이라는 공간의 활용이다. 푸른 바다, 돌담길, 감귤밭, 그리고 어머니의 손맛이 서린 밥상. 드라마는 시각적으로도 풍성하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삶을 이어가고, 상처를 안고도 사랑하고, 다시 내일을 살아간다. 제주라는 공간이 단지 배경이 아닌, 또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결국, 우리의 이야기
‘폭삭 속았수다’는 그저 ‘재밌다’, ‘감동적이다’로 표현하기엔 아쉬운 작품이다. 누군가는 부모님의 삶을 떠올릴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자신의 고향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떤 시청자에게는 잊고 있었던 첫사랑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
나 역시 순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내 어린 시절,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이야기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는, 우리의 ‘마음속 어디쯤’을 건드리는 힘이 있다.
넷플릭스에서 쉽게 지나치기엔 너무 아까운 이 작품. 아흔 살 순이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그 안에서 우리 모두의 인생이 보인다. 폭삭 속았다? 아니, 따뜻하게 속았다. 그것도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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